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반일 종족주의/비판 (문단 편집) == 이승만의 반일성향 문제 회피 == >'''과거 한국을 현대화된 일본과 비교하는 것은 과거 일본을 현대화된 한국과 비교하는 것처럼 불공정한 것이다.''' 일본을 예로 들면 과거 [[페리 제독]]이 일본을 처음 [[쿠로후네 사건|방문]]했을 때 일본은 정치적으로, 도덕적으로, 물질적으로 '''한국보다 훨씬 못했다'''.[* 참고로 이영훈은 한국인들이 최악의 국가인 조선을 미화하며 반일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데 한국 교과서나 드라마에서도 조선의 내부모순이나 실책, 문제점은 다 나타나 있다. 오히려 본인이 존경하는 이승만 대통령이 조선을 현 한국인들보다도 미화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이승만도 조선에 대한 비판 또한 여러 번 했다.] 정치적으로 일본은 수많은 분국으로 쪼개져 서로 싸움을 일삼고 있었으나 한국은 중앙정부의 일원적인 통치를 받고 있었다. > >물질적으로 보더라도 당시 일본은 이렇다 할 도로나 건물, 위생시설이 거의 없었다. 그러던 일본이 변하게 된 것은 전국적으로 서구문명을 도입한 뒤부터였다. 한국도 만일 한국이 자신의 계획대로 추진해 나가도록 허용했다면 한국은 일본이 이룩한 것을 [[자본주의 맹아론|'''당연히 이루어냈을 것''']]이다. > >---- >이승만 뉴욕타임즈 사설, '한국인들은 일본인들보다 명백히 우수하다', 1919. 5. 18. [[http://syngmanrhee.kr/46/?q=YToyOntzOjEyOiJrZXl3b3JkX3R5cGUiO3M6MzoiYWxsIjtzOjQ6InBhZ2UiO2k6Njt9&bmode=view&idx=288952&t=board|출처: '''이승만학당''']][* 이승만학당은 반일 종족주의의 저자 중 한 명인 '''이영훈이 세웠다'''. 이승만학당의 홈페이지에서는 지금도 친일타령을 그만하자는 주장을 찾아볼 수 있다. 설령 반일 종족주의의 주장이 전적으로 맞다고 가정해도, 그 내용은 위에 언급된 이승만학당에서 언급된 이승만의 뜻에 반하는 것이다.], [[http://xn--zb0bnwy6egumoslu1g.com/bbs/board.php?bo_table=Article&wr_id=5|이승만기념관]] >일인들이 저의 죄를 회개해서 우리와 평화롭게 살자하며 친일하는 한인의 남녀들을 시켜서 다 한국에 충성하는 백성이 되도록 힘쓰게만 한다면 아무리 아프고 쓰린 것도 차차 잊어버리고 양국이 평화로이 지내기를 도모하기로 하고, 이 뜻을 공포해서 일인들도 다 알만치 만들어준 것인데, 그동안 지낸 경과를 보면 일인들은 여전히 한국을 병탄할 목적을 변치 않고 공개적으로 혹은 비밀적으로 모든 행동과 선전하는 것을 볼 때 한국을 '''무시하고''' 한인들을 '''모욕하는''' 것이 '''전만 못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 > > ...(중략)... > > 여섯째로는 모든 친일분자들을 일본에 모아다 보호해놓고 이 분자들을 통해서 우리나라 '''국권 요란을 선동'''하기를 마치 이전 이조 말년에 [[우범선|망]][[유혁로|명]][[이두황|객]]들을 모아다놓고 [[명성황후|남의 국모]]를 [[을미사변|암살]]하며 '''침략하던 악습'''을 행하고 있으니 일인들의 야심을 우리가 더 말할 것 없이 보고 앉은 것이다. > >...(중략)... > > 이런 야심가진 침략자들에게 뒷문을 열어놓고는 우리가 자유를 보존하지 못할 것이오, '''나라를 잃어버리고는 살아갈 수 없는 것'''을 '''[[일제강점기|기왕 사십년 경험]]으로 다 알고'''[* 1960년대부터 반일 종족주의가 성숙하여, 1980년대에 폭발하였다는 책의 주장과 모순된다. 나라를 잃어버리고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다 알고 있다'''는 언급이 1954년에 있기 때문이다.] 있으니, '''공산당과 친일반역분자'''는 다 분간해서 후환을 막아야만 될 것이다. >---- >1954년 5월 13일 이승만 담화, 동아일보, 1954. 5. 14.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4051400209201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4-05-14&officeId=00020&pageNo=1&printNo=9576&publishType=00020|#]] >지금 우리나라의 걱정은 공산당보다 더 '''음험한 것'''이 일본의 야심이다. 그러므로 일인을 걱정하여야 하며 일인이 선전술이 있어서 미국인이 그것을 들어 주고 일본을 부강하게 하고 타국을 거기다 따라가게 하자는 것이 '''동양의 문제'''다. 그러므로 어려운 것이고 또 한인 중에도 친일(親日)하는 자가 있어 일본에 의뢰하는 생각을 가진 분자가 적지 않다. 그러니 그러한 자를 잘 분간하여야 한다. >---- >1954년 10월 7일 이승만, 인하공전 개교식에서 [[http://dams.pa.go.kr:8888/dams/ezpdf/ezPdfReader.jsp?itemID=/DOCUMENT/2009/11/26/DOC/SRC/0104200911264051300040513012480.PDF|#]] 위의 소개에 적힌 "친일은 악(惡)이고 반일은 선(善)이며 이웃 나라 중 일본만 악의 종족으로 감각하는 종족주의. 이 반일 종족주의의 기원, 형성, 확산, 맹위의 전 과정을 국민에게 고발하고 그 위험성을 경계하기 위한 바른 역사서!"라는 반일 종족주의란 책의 주제의식에 근거한다면 사실 한국 대통령 중에서 제일 심각하게 비판받아야만 하는 대통령은 [[이승만]]이다. 사실 이승만은 반일을 넘어 거의 '''[[혐일]]''' 수준으로 일본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반일종족주의를 비판하는 진보 진영에서 아직까지 이 부분에 대해 제대로 지적하지 못하고 있으나, 이 부분만 집중적으로 부각시켜도 반일종족주의와 더 나아가 [[뉴라이트]]의 정체성이 근본적으로 흔들릴 수 있다. 뉴라이트 인사들이 한국의 반일 민족주의를 부정적으로 폄하하면서 정작 가장 강경한 반일 민족주의자인 이승만을 찬양하는 일은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모순이기 때문이다. * [[이승만/평가]] 문서의 [[이승만/평가#친일몰이|친일몰이]] 항목에 훨씬 다양한 예시가 있다. [[친일몰이]] 항목도 참고. * [[평화선]] 당시 일본어부에 대한 대응[* 이때 이승만은 해군을 동원해서 독도 영해를 넘어오는 일본 어민들을 체포하고 필요하면 발포하라고까지 명령을 내렸다. 그 결과 약 4천 명의 일본 어민들이 한국 해군에 체포되어 한국 형무소에 감금되었고 그들 중 '''44명이 죽었다.''' 역대 한국 대통령들 중에서 이렇게까지 일본을 상대로 강경하게 나간 인물은 없었다.] * '''[[니가타 일본 적십자 센터 폭파 미수 사건]]''': 일본이 재일한국인들을 남한이 아닌 북한으로 보내버리려는 재일교포 북송 사업을 하려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서 폭파사건을 모의했었다. * 일본과의 국교정상화 협상에 대한 무성의한 태도.[* 이승만 정권은 임기내내 일본에 대해 강경하게 나갔다. 대표적인게 [[평화선]] 선포와 해군까지 동원하여 그 선을 넘은 일본 어선에 대해 나포하는 등 일본의 압력에도 독도를 사수해냈다. 심지어 미국과의 정상회담에서 이승만이 일본과 국교를 재개하라는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의 권유를 "내가 대통령에 있는 동안에는 일본과 결코 상종하지 않겠다."라고 끝까지 거부하자 빡친 아이젠하워가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리는 해프닝도 있었다. 한국전쟁 중에는 미국이 일본군의 참전을 얘기하자 "'''만약 그렇게 하면 공산군보다 먼저 일본군에 맞서 싸울 것.'''"이라고 강력히 반대한 적도 있다.] * 대마도 반환 주장 * 1954년 스위스 월드컵 극동 예선에서 일본 대표팀의 한국 입국 거부[* 이승만이 무슨 일이 있어도 일본 축구 대표팀은 한국 땅에 들어올 수 없다고 강경하게 반대하는 바람에 원래 서울과 도쿄 두 곳에서 열리기로 한 예선전은 어쩔 수 없이 도쿄에서 두 번 모두 치러져야 했다. 출처: 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2권/ 166~168쪽][* 그리하여 1954년 3월 16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스위스 월드컵 예선전에서 한국 대표팀이 일본 대표팀과 축구 경기를 했을 때, 한국 사회에서는 한국 대표팀을 가리켜 "일본에 지면 현해탄에 빠져 죽으라!"는 반일 감정을 자극하는 분위기가 가득했다. 출처: 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2권/ 166~168쪽] * 1959년 6월 15일 대일 경제단교 및 일본 왕래금지 성명 발표[* 당시 언론은 이승만 정권의 경제단교 조치에 대해 그것은 일본을 제재하는 게 아니라 한국을 제재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출처: 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3권/ 236쪽] 강경함과 폭력성의 수준을 따져봐도 이승만은 한국의 대통령 중에서 반일 발언 및 대응이 제일 심하였으며 다른 누구도 아닌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므로 "반일 종족주의의 기원, 형성, 확산, 맹위의 전 과정"에 매우 중요하게 거론해야 할 인물이기 때문에 반드시 한 챕터 이상을 할애하여 이승만 대통령 집권시기 이루어졌던 행보를 심도있게 다루어야만 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저자의 명확한 의견 표명을 확인할 수 없으며 오히려 이승만 찬양만 도배되어 있다.[* 이영훈은 이승만 팬사이트 '이승만학당'의 주필이다.] 이에 대해서 이영훈은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승만이 지나치게 경직된 반일정책을 폈다'며 이승만이 강력한 반일정책을 실행한 사실을 인정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주장하며 변론하였는데 미국은 일본이 공산품을 한국에 수출하고, 한국은 농·수산물을 일본에 수출하는 방식으로 경제를 개발하라고 요구를 했으나, 이승만은 그렇게 되면 한국 경제가 일본에 종속될 것을 우려하였다고 한다.[* 다만 그런 식의 주장대로라면 박정희 시절에 한국 경제가 일본 경제에 종속되었다는 비판도 가능하다. 한 예로 박정희 집권기에 중앙정보부장을 지냈다가 미국으로 망명한 김형욱의 회고록에서도 박정희 시절, 한국 경제가 일본 경제에 종속되었다는 비판을 기술했다. 그런데 이승만 시절에 한국 경제가 일본에 종속되면 나쁘고, 박정희 시절에 종속되면 어쩔 수 없다고 볼 수 있을지 의문. 출처: 혁명과 우상 김형욱 회고록 5권/ 김경재 저/ 인물과사상사/ 2009년 7월][* 이런 식의 이승만이 한국 경제가 일본에 종속될 것을 우려하여 반일 정책을 펼친 것이라고 변론하는 것은 또다른 어폐가 있다. 이영훈은 이승만의 사례와 달리 현재 한일 무역분쟁에 대해 맹목적인 반일에 의한 결과물로만 판단하고 있지만 한일 무역분쟁의 근본적인 문제점중 하나는 한국의 차세대 산업중 하나인 반도체, 메모리 산업에 대한 아주 치명적인 정책을 실행했기 때문이고 이는 한국에게 있어 일본의 경제종속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고 이에 한국이 당연히 일본에게 반감을 품을 만한 현실적인 이유가 있는 것이다. 게다가 원인도 일본이 제공했는데 지금까지 한일간에 이루어져오던 산업간의 국제분업을 일본 정치권에서 정치적 사안을 이유로 개입해서 인위적인 제재 정책으로 헝클어놓은 것이다.] 또한 독립한지 얼마 안 된 신생국으로써 정체성의 확립을 위해 반일정책을 펴야 했다고 답했다. [[https://mnews.joins.com/article/23554291|#]] 하지만 이승만의 독립운동, 이후 행적들과 발언들을 보면 국가 정체성의 확립을 위해 반일 정책을 펴야 했다는 것은 이영훈 본인의 변명에 가까운 것이다. [[일본 내막기]]등을 저술하고, 대통령 집권이후 대 일본 정책들을 보면 단순한 집권자로서의 정책이 아니라 이승만 개인 스스로도 상당힌 강경한 반일 성향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미 미국에서도 이승만에 대해 명확하게 반일 성향이라고 정리했으며[* 아예 미국내에서 일부 관료는 한일 관계 개선은 이승만이 현장에서 사라진 후라고 평할 정도였다.[[https://news.joins.com/article/23640107|이승만 제거 4번 검토한 美···'반일 한국'에 원조 깎아버렸다]]] 독도 평화선에 대한 대책만봐도 대한민국 외교사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초강경한 반일 정책들 일색이다. 이정도의 강경한 반일 정책들을 펼친 정치인에 대해 반일 성향이 아니라고 한다면 앞으로도 대한민국의 그 누구도 반일이라고 봐서는 안될 것이다. 사실 이영훈이 이승만의 반일정책에 대해 인정한 것 자체가 그의 학문적 정체성을 뿌리부터 뒤흔드는 아킬레스건이 될 수 있고[* 다만 이영훈 본인은 2004년 9월 5일 중앙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구 일본군이 위안소를 설치하여 여성을 강제 동원하고 감금하여 병사들에게 성적 위안을 강제한 행위는 국제사회가 협약으로 금하고 있는 성노예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이 자리에서 분명히 하고자 합니다."라고 해명했다가([[https://news.joins.com/article/385601]]), 15년 후인 2019년에는 위안부 강제 동원의 증거가 없고 위안부는 성노예가 아니고 자발적인 자영업자였다며 중앙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자신이 했던 주장을 정반대로 뒤집었고, 이에 대해 MBC 스트레이트 기자가 해명을 요구하자, [[개소리|"당신은 15년 전과 같으냐?"]]라고 윽박지르며 폭력을 행사한 일이 있다. 이영훈이 이승만의 반일정책에 대해 인정을 했다고 해도 나중에 가서 위안부 문제처럼 그건 사실 반일이 아니었다느니 하는 식으로 말을 바꾸거나 할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도 이것 때문에 자신의 주장에 부합하면 선택적으로 채택해서 써먹고 아니면 철저하게 외면하거나 침묵한다.[* 뉴라이트 전체의 문제점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들 때문에 대중들에게 이승만의 외교 노선과 성향이 상당히 왜곡된 상태로, 아예 이승만 본인이 친일파 아니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지경이 되었다.] 그의 사상적 가치의 중심은 이승만 재평가와 일제강점기에 대한 국민 저변적인 '오독'을 해소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기준에서 대한민국 정부의 기원이자 최고권력자였던 이승만에 의해 반일 정책이 주도적으로 이뤄졌고 반일 감정이 고조되었다는 아이러니는 자신이 추구하는 두 가지 중요 가치를 한번에 묶어서 헝클어놓는 내용이기 때문에 도저히 양립할 수가 없는 모순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